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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5.14 팔로미노 블랙윙(Palomino Blackwing) 602
  2. 2018.05.02 로트링 600 (Rotring 600) 0.5mm

이 연필은 그냥 전설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들락거리기를 반복하다가 다시금 재탄생한 현재의 제품은 예전의 그것에 못 미친다고 냉정히 평가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블랙윙을 쓰며 생각하기에도 난, 이 연필에 대한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평가에 구구절절 공감하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지금껏 써본 것 중에 최고야. 물론 값이 세 배는 더 비싸지만 검고 부드러운 데도 잘 부러지지 않아. ……정말로 종이 위에서 활강하며 미끄러진다니까.”

-제임스 워드(James Ward) <문구의 모험(Adventures in Stationery)>에서 발췌

 

에버하드 파버(Eberhard Faber)가 1934년에 출시했다는 이 연필은, 물론 단순히 수치화된 역사로만 놓고 보자면 파버카스텔이나 스테들러의 그것에 비해 나이는 어릴지 모르나, 물론 마찬가지로 뛰어난 그 연필들보다도 솔직히 실력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점하고 있다. 절반의 힘으로 두 배의 쓰기 속도를 낼 수 있다는 문구가 정말 (체감상) 사실인 데다가, 그런 물리적인 것을 초월하여, 쓰는 사람에게 긍정적인 정서를 안겨다 주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서술하자면, ‘유럽 연필 기준의 2B’일본 연필 기준의 HB’ 그리고 한국 연필 기준의 B’미국 연필 기준의 약 HBB’에 해당하는 경도를 좋아하는 나에게 이 연필은 일단 최상의 진하기를 제공한다. 가장 균형 잡혔고, 흠잡을 데가 없다.

 

그래도 3가지 단점이 있긴 한데, 첫 번째는 불필요한 지우개. 물론 그 부분이 블랙윙만의 독특한 상징이라는 건 잘 알겠는데, 그래서 이게 바뀌었으면 하는 마음은 전혀 없는데, 그래도 불편하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난스럽게 길고 큰 모양으로 장착된 금속에, 철제 고정장치를 포함하고 있는 지우개는, 정말 무거워 글을 쓰는 데에 지장을 줄 정도이기 때문이다. 새 상품일 때의 블랙윙을 쓰고 있을 때면, 정말 누가 연필을 짓누르며 잡아당기고 있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지우개는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이건 정말 거슬리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가격. 이 연필은, 뒤에 지우개가 달린 동일한 조건의 한국 연필과 비교해 봤을 때, (동대문 문구시장의 살아 숨 쉬는 가격 기준으로) 국산 연필의 자그마치 10배에 달하는 가격을 자랑한다. 물론 이것도 나 같은 특수 매니아의 구매 경로 기준이고, 교보문고 핫트랙스 같은 일반적인 장소에서 구매하려면 13배 정도는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아무리 좋은 연필이라고는 해도 매우 비싸다는 점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마지막 세 번째는, 집중을 방해한다는 것. 이 연필은, 창작자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조력자인 동시에, 본인의 매력이 너무 뛰어나 창작자가 정신을 못 차리게끔 만드는 역설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뭔가를 쓰고 있다가도, 이 연필의 생김새가 너무나도 감탄스러워 그냥 연필만 몇 분간 어루만지고 있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실제로 쓰기에도 훌륭하고, 보고만 있어도 좋다. 완벽하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한데, 그 이상으로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글을 쓸 때의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정서를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물체로 표현할 수 있다면, 아마 그 정의 중 하나는 분명 이 블랙윙 602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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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링 600 (Rotring 600) 0.5mm  (0) 2018.05.02
Posted by 이동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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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옛날부터 무거운 필기구를 쓰는 것에 대한 환상을 적지 않게 갖고 있었다. 무게감이 있는 도구의 끝에서 탄생하는 창작물은 뭔가 더 완성도 있고 치밀하며 강렬한 성격을 지닐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편의와 실용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탓에 무거운 샤프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비쌌다. 가격대와 무게가 거의 정비례하는 상황. 결국 난 무게가 그리 만족스럽게 많이 나가진 않더라도 가격대를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무거운 축에 속하는 샤프를 하나 사기로 했는데, 그게 바로 이 로트링 600이다. (0.5mm 이하만 사용하는 사람이기에, 파버카스텔의 베이직 메탈은 주요한 고려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더 무겁고 괜찮은 가격대임에도.) 물론 천 원짜리 이마이크로 제도 샤프가 더 익숙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라면 이것 또한 기겁할 가격이기는 하다. 매장에 따라 가격이 조금씩 다르긴 하겠지만, 2018년 현재 최소 3만 원 선이니 말이다.

 

 

무게는 24g으로 일반적인 샤프의 3배 정도가 나가는 이 샤프는, 바디 전체가 황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이를 들고 있으면 정말로 쇳덩어리를 다루는 느낌이 들며, 또한 그립 부분의 로렛 가공으로 인해 거친 돌을 다루는 느낌도 든다. 게다가 배럴에 인쇄된 로트링 600의 로고는 다른 샤프의 로고와는 달리 아무리 오래 써도 지워지지가 않는 선명함을 자랑하는데, 그래서인지 이걸 손에 쥐고 있으면 왠지 아주 거칠고 강직하며 또렷하고 영롱한 문장들을 써내려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어서, 쓰는 사람만 쓰고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이 쓰지 않는 클립을 살펴보자면, 일단 매우 힘이 세다. 쉽게 휘곤 하는 펜텔의 P205(그리고 클립을 공유하는 PG5)나 스매쉬와는 차원이 다르게 힘이 세다. 그런 사람을 실제로 한 번도 보진 못했지만, 정말로 샤프의 클립에 종이를 꽂는 등 그것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이 클립은 클립계의 이상향으로 느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클립 위에는, 로트링이라는 이름답게, 브랜드를 상징하는 붉은 원형 고리가 있다. 이건 막힘 없이 무한정으로 돌아가는데, 심심할 때 돌리고 있기 좋다. 그 아래 있는 심경도계는 그립과 마찬가지로 로렛 처리가 되어있는데, 너무 뻑뻑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게 매우 적당한 정도를 유지하며 돌아간다. 아무래도 제도용 샤프이니만큼 하드 쪽으로 더 많은 표시를 할 수 있게끔 되어있다. 4H, 2H, H, F, HB, B, 2B 순서. 제도용으로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필기용으로만 사용하며, 블랙 계열 심(심지어 필기할 때 4B를 쓰기도 한다!)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다소 아쉬운 부분. 하지만 이 샤프의 원래 목적을 생각하자면 아쉬울 건 전혀 없다.

 

그렇게, 종합적으로 매우 만족감을 주는 샤프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우선, (내가 갖고 있는) 블랙의 경우, 그립이 너무 잘 벗겨진다는 것. 몇 달만 사용해도 이 그립은 사실상 실버가 되어버리는데, 난 이걸 한 3년째 전투급으로 쓰고 있으니, 사진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실제로 보면 정말 뭔가 큰 시련을 겪은 샤프처럼 보인다. (게다가 매우 촘촘한 그립이라 홈이 상당히 많으니, 여기에 끼는 온갖 이물질들도 상상을 뛰어넘는다.)

 

두 번째로는, 무게에 따른 위험성. 난 워낙 이 샤프를 햄스터 다루듯 귀하게 다루니 한 번도 떨어뜨린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은 게, 떨어지면 곧바로 못쓰게 되겠구나 하는 것이다. 일명 쿠크다스 촉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로트링 600의 촉은, 분명 금속이기는 하나, 황동 바디를 견뎌내기엔 한 눈에 보기에도 너무나도 연약하다. (그냥 그럴 것 같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떨어뜨리고 슬리브가 박살났다는 후기들이 참혹하리만치 생생하게 지금 이 순간에도 왕왕 전해지고 있다.) 샤프를 소중히 다룰 자신이 없으며 물건을 떨어뜨리길 반복하는 사람이라면 이 샤프는 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샤프는 그립과 선단만을 교체할 수 있게 돼 있다. 하지만 그렇게 그 부분만 사는 것도 만만찮게 비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샤프의 최대 장점으로 유격이 없다는 것을 꼽고는 하는데, 글쎄다. 난 솔직히 유격이 느껴진다. 차라리 유격 부분에 있어서는 스매쉬 같은 샤프가 더 나은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난 샤프 유격은 이마이크로 제도 수준이 아니라면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 사람인데, 그래도 느껴질 정도의 유격이었다. 원래 이런 건지 제품 복불복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유격이 느껴지긴 느껴진다. 참고로 난 이걸 떨어뜨린 적도 한 번도 없다. 완벽하게 유격이 없는 샤프를 사고자 하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이 샤프를 살 생각인 사람인 사람이라면, 재고해보길.

 

마지막으로, 내가 이 샤프의 최대 결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클리어핀이 없다는 것이다. 무려 '제도 샤프'인데, 게다가 나름 고가에 속하는 건데, 어떻게 지우개에 클리어핀이 없을 수가 있나. 노크 캡에 구멍이 뚫려 있는 건, 욕하는 사람이 많았어도, 난 그건 나름 좋았다. 손톱으로 치면 아래 위로 뚫린 텅 빈 원기둥에서 나는 맑은 소리가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리어핀이 없다는 건 용서가 안 되는 부분이다. 천원짜리 싸구려에도 달려있는 클리어핀이 어떻게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럼 슬리브가 막히면 그냥 버리라는 건지...?

 

결론. 이 샤프에 대해 딱 하나의 문장으로만 표현할 수 있다면, 난 이것을 정말 좋은 샤프라고만 말하겠다. 당신이 창작자라면, 그리고 주위의 사물들에서 자극을 많이 받는 편이라면, 이 샤프는 당신에게 매우 훌륭한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조심성이 다소 떨어지는 사람이라면, 이건 안 사는 편이 낫겠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 샤프는 매우 비싸다못해도 일반 샤프 35자루쯤은 사고도 남을 가격이라는 것을 충분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 샤프를 사서 처음 사용하는 초기 몇 주간은 이 샤프를 매일 쓸 수도 없다. 정말 무거운 샤프라 몸이 적응을 못해, 초장부터 계속 쓰기엔 손목이 아프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건 하루 서너 시간 이상 필기를 하는 사람 기준이다.) 돈으로 인한 진입장벽도 높고, 여러모로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샤프다. 하지만 필기구에 애정을 많이 쏟는 사람에게라면, 이만한 샤프가 또 없을 것이다.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샤프와 상호존중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내가 보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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