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필은 그냥 전설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들락거리기를 반복하다가 다시금 재탄생한 현재의 제품은 예전의 그것에 못 미친다고 냉정히 평가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블랙윙을 쓰며 생각하기에도 난, 이 연필에 대한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평가에 구구절절 공감하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지금껏 써본 것 중에 최고야. 물론 값이 세 배는 더 비싸지만 검고 부드러운 데도 잘 부러지지 않아. ……정말로 종이 위에서 활강하며 미끄러진다니까.”

-제임스 워드(James Ward) <문구의 모험(Adventures in Stationery)>에서 발췌

 

에버하드 파버(Eberhard Faber)가 1934년에 출시했다는 이 연필은, 물론 단순히 수치화된 역사로만 놓고 보자면 파버카스텔이나 스테들러의 그것에 비해 나이는 어릴지 모르나, 물론 마찬가지로 뛰어난 그 연필들보다도 솔직히 실력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점하고 있다. 절반의 힘으로 두 배의 쓰기 속도를 낼 수 있다는 문구가 정말 (체감상) 사실인 데다가, 그런 물리적인 것을 초월하여, 쓰는 사람에게 긍정적인 정서를 안겨다 주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서술하자면, ‘유럽 연필 기준의 2B’일본 연필 기준의 HB’ 그리고 한국 연필 기준의 B’미국 연필 기준의 약 HBB’에 해당하는 경도를 좋아하는 나에게 이 연필은 일단 최상의 진하기를 제공한다. 가장 균형 잡혔고, 흠잡을 데가 없다.

 

그래도 3가지 단점이 있긴 한데, 첫 번째는 불필요한 지우개. 물론 그 부분이 블랙윙만의 독특한 상징이라는 건 잘 알겠는데, 그래서 이게 바뀌었으면 하는 마음은 전혀 없는데, 그래도 불편하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난스럽게 길고 큰 모양으로 장착된 금속에, 철제 고정장치를 포함하고 있는 지우개는, 정말 무거워 글을 쓰는 데에 지장을 줄 정도이기 때문이다. 새 상품일 때의 블랙윙을 쓰고 있을 때면, 정말 누가 연필을 짓누르며 잡아당기고 있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지우개는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이건 정말 거슬리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가격. 이 연필은, 뒤에 지우개가 달린 동일한 조건의 한국 연필과 비교해 봤을 때, (동대문 문구시장의 살아 숨 쉬는 가격 기준으로) 국산 연필의 자그마치 10배에 달하는 가격을 자랑한다. 물론 이것도 나 같은 특수 매니아의 구매 경로 기준이고, 교보문고 핫트랙스 같은 일반적인 장소에서 구매하려면 13배 정도는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아무리 좋은 연필이라고는 해도 매우 비싸다는 점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마지막 세 번째는, 집중을 방해한다는 것. 이 연필은, 창작자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조력자인 동시에, 본인의 매력이 너무 뛰어나 창작자가 정신을 못 차리게끔 만드는 역설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뭔가를 쓰고 있다가도, 이 연필의 생김새가 너무나도 감탄스러워 그냥 연필만 몇 분간 어루만지고 있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실제로 쓰기에도 훌륭하고, 보고만 있어도 좋다. 완벽하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한데, 그 이상으로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글을 쓸 때의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정서를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물체로 표현할 수 있다면, 아마 그 정의 중 하나는 분명 이 블랙윙 602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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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동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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